정통론(正統論)은 한 시대의 통치세력이 분립되었을 때 그 중 어느 세력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가를 구별할 때 활용된 이념체계다.
이것은 전근대 역사서술에서도 나타나 역사관을 형성하기도 했다. 통일을 지향하면서 분단의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정통론과 함께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 정통론이 역사서술에 본격화된 것은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에서다.
성호 ‘삼한정통론’의 핵심은 한국고대사에서 위만조선과 마한이 동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 그 정통성이 마한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전에
단군→기자→위만으로 내려왔다고 본 한국고대사의 계통을 위만 대신 마한으로 대체시켰던 것이다. 그는 한국사를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로 계통화시키고 그 대신 위만을 정통에서 제외시켜 윤통(閏統) 혹은 참위(僭僞)로 규정했다. 그는 마한이
단군·기자로부터 내려오던 나라를 보전하고 문화를 전수받았기 때문에, “마한을 동국(東國)의 정통이라 부른다”고 했다.
대세론적 관점과 의리론적 관점
성호 때에 본격화된 정통론은 이종휘(李種徽, 1731∼1797)에 이르러 그걸 뛰어넘는 한국고대사 체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는 단군의 전통을 한편으로는 부여·고구려(백제)를 거쳐 삼국에 이르는 것으로, 또 한편으로는 기자·마한과 기자·위만의 계통으로 전승되어
삼국시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함으로써 정통론을 비껴가고 있었다. 그의 한국사 인식체계가 단재 신채호(申采浩)에 영향을 미쳐 한국 고대사를 더
폭넓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정통론이 삼국시대 역사를 쓰면서 본격화되었다. 후한(後漢, 25∼220)에 이어
위(魏, 220∼265)·촉(蜀, 221∼263)·오(吳, 222∼280)의 세 나라가 나타났는데, 후한을 잇는 정통국가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이 정통론의 골자였다.
진수(陳壽 233∼297)는 『삼국지(三國志)』를 써서 위를 삼국 중 정통으로 보았다. 그는 대세론에
입각하여 역사를 썼다. 위 나라가 가장 광대한 영토와 인민을 소유했고, 위의 조비(曺丕)가 후한 헌제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문제(文帝)가
되었다고 보았다. 진수는 그 부자가 촉(한)으로부터 좋지 않은 일을 당한 경험도 가진 데다가, 위가 진(晉)으로 바뀐 후에 『삼국지』를 편찬했기
때문에 진의 전 왕조인 위에 대한 의리도 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뒤 동진(東晉, 317∼420)의 습착치(習鑿齒
?∼384)는 후한 광무제로부터 서진 민제에 이르기까지 서술한 『한진춘추(漢晋春秋)』에서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다. 그는 역사를 다분히
의리론의 관점에서 보았는데, 위나라의 조비가 후한 헌제를 협박하여 왕위를 찬탈한 역신(逆臣)이므로 정통성이 없다고 보았다. 습착치가 위나라를
정통으로 볼 수 없다고 한 데에는 자기나라 동진이 처한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만약 대세론적인 입장에서 위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게 되면,
오호(五胡)에 의해 멸망되었다가 남쪽으로 가서 재건한 동진의 역사적 위치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진수처럼 대세론적으로 정통을 따진다면,
서진을 멸망시킨 흉노가 중국의 정통을 잇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통론은 그 뒤 북송(北宋, 960∼1127)의
사마광(司馬光)과 남송(南宋, 1127∼1279)의 주희(朱熹, 朱子)에게서도 보인다.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대세론적인 관점을
취한 데 비해 주희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대의명분에 입각한 정통론을 주장, 삼국시대에는 촉을, 남북조시대에는 동진을 정통으로
잡았다. 이 또한 주희가 소속했던 왕조가, 금(金, 1115∼1234)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온 남송이라는 현실을 감안했던 것이다. 진수나
사마광처럼 대세론적인 입장을 따른다면, 주희는 자기나라 남송보다 강력한 금나라가 중국의 정통성을 갖는다고 본 것이 아닐까. 여기서 서진의 진수와
북송의 사마광과는 달리 동진의 습착치와 남송의 주희가 촉(한)을 정통으로 서술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국권회복·민주주의·복지 등을 기준으로
여기서 정통론적 시각을 가지고 분단사를 쓰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적통·정통이니 윤통·참위니 하는 가치관을
넣게 되면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면 분단시대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서로를 아우르되
인류보편의 가치관을 담아 서술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한국의 분단사 서술에도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치는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 외세강점 시대에 얼마나 국권회복(독립)운동에 힘썼는가 하는 것이 역사서술에서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제대로 끌어안고 이를 역사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와 함께 해방 이후의 자주성의 문제도
평가의 중요한 요인일 것으로 본다.
남과 북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양쪽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심화 확대 발전시켰는가
하는 것이 역사기술과 평가의 중요한 내용이 될 것이다. 이는 남북의 건립이념 실천여부를 가름하는 것이며, 인류가 지향하는 역사의 발전방향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개인의 자유와 민권의 신장, 민주제도의 확립과 발전도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또 민중/인민의 복지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하는 것이 남북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경제와 사회, 교육과 문화 등 전반적인 인간의 삶의 질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분단시대의 민족사가 이런 관점에서 쓰여지게 된다면, 남북은 분단시대에도 이런 가치관을 실현하려고 경쟁적으로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쓰여질 분단시대의 역사도 이런 관점에서 쓰여진다면, 남북의 진영논리를 뛰어넘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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