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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성에서 세계적인 황제가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
근데, 우리 정치를 보면 아닌 것도 같다. 황제는 크녕 한반도 반쪽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피란지로 이용되었던 대규모 산성이다. 고려 말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피해 인근 백성들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다고 하며, 조선 태종 10년(1410)에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방상의 요충지로 부각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는 외성을 쌓는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으며, 고종 5년(1868)에도 새로 고쳐 쌓았다고 한다.
내외 성벽의 총 길이는 6.3㎞이며, 금오산의 정상부에 테를 둘러쌓은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과 정상부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포곡식으로 쌓은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내성의 둘레는 약 4km이며, 험한 절벽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계곡을 둘러 싼 외성은 둘레가 약 2km이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계곡과 연못, 우물이 많았고, 대혜창과 내성창 등의 창고와 진남사(鎭南寺)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 외성의 문터,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성문인 암문의 형체, 그리고 각종 건물터 들이 남아 있다. 또 성 안 고종 5년(1868)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가 있다. 금오산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의 공격을 막아 경상도 일대를 수비한 중요한 산성이다.
상세설명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고려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을 두었다. 조선 태종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 외성을 쌓는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고종 5년(1868)에 새로 고쳐 쌓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1개의 계곡과 여러 개의 연못·우물이 있었으며,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 군기고, 진남사가 있었다고 한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 누정(樓 亭) 백운재(白雲齋), 경파정(景坡亭), 금오정(金烏亭), 대관정(大觀亭), 취영정(聚英亭), 진덕정(進德亭), 긍운정(肯雲亭)....
조선 왕조는 전통적으로 전주 이씨라는 것으로 호남을 우대 하고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도 호남 동부 세력인 동인들이 주도하여 국난에 대처 했다. 임진 왜란 이후로 영남의 인재들이 본격적으로 발탁 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호서세력(유성룡, 권율, 이순신,) 조선을 주도 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영남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금오산의 황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를 다스릴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숭산과 금오산이 황지의 터임에도 물이 없어 활원이 안된다는 뜻에서 9정 7택을 조성하여 만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게 했다.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금오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풍수설도 많은 산이어서 특히 왕이 태어날 운세라는 금오산 중국과 일본을 먹여 살릴 대혜를 베풀 세계를 이끌 황제가 조선 땅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큰 덕을 외치는 소리는 지금 이시간에도 쉬지 않고 있고 지난 420년 간 흘러 내렸었다. 정상부에는 용샘(龍泉)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못한 애절한 건설이 깃든 용샘이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인 고종은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강간 살해되어 시신이 강제로 화장되고 말았었다.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19년 후인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했고,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에 국민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임진 왜란의 배설이 역적이거나 탈영병이라면 고종 황제가 영국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국난 앞에서 고종황제가 배설의 이름을 부활시킨 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역사왜곡 임을 알 수 있음에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조롱하고 있으니 어리썩음을 어찌하랴?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 #39;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 #39;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
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 #39;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9;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금오산 성 북문에 & #39;큰 은혜& #39;를 뜻하는 이름이 붙은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 #39;큰 은혜& #39;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 #39;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 #39;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 #39;읍참마속& #39;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대혜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 #39;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금오산의 물이 들어 온다면 & #39;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 #39;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금오산성을 배설이 중수한 이후에 이 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과 수많은 중소 기업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생겼났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축으로 하든 시대라면 꿈도 못꿀 일이 실현된 것입니다. 지금도 경남의 사람들이 금오산 대혜폭포의 물을 병에 받아 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군 대장 이여송이 직접 구미 금오산 지맥을 칼로자른 용우뜸에 칼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여대로가 배설이 축성한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란 구절 이로인해 조선의 금오산 황제출현 전설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남,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을 이루려는 뜻이 남달랐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정구(鄭逑)·장여헌(張旅軒)·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정암진 전설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여대로란 도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곽재우 장군를 보좌한 배설의 아들 등암 자장의 역할에 고무되어 예측한 전설이하는 주장과 여씨 시조가 정암진 부근에 있는데서 미래의 환영을 투시했었는가 보다. 어째튼 기업인들은 이러한 전설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음에도 금오산을 기축으로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한국인들이 일본 관광중에 꼭 한번 정도 가보는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구마모토산성이 바로 임진왜란에 울산에서 배설의 금오산성과 대치하면서 연구하여 금오산성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안에 우물을 24개나 만든 유일한 산성이기도 하다.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일본측의 임진왜란 15만 8천 대군중에 약 5만 명이 굶주려 죽은 사실입니다. 당시는 경상도가 남북이 없이 하나였고, 금오산을 반경으로 영남 병사들 5만을 살린 것이 결국은 일본의 군량 때문이었다고한다.^^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 #39;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 #39;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 #39;세루& #39;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주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 #39;세루& #39;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 #39;시무상주& #39;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제1차 진주성 대첩이 승리했으니 포상이 내려집니다.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は歌う。かつて熊川海?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がスパイと?筒と朝鮮軍を買わに運?してチルチョン海?では、敵に?敗を喫した。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が聞いて、敗?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조실록> (출처: 명량 왜곡과 진실 미출판부분 공개자료)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군님의 명령은 받았다고 보입니다.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 #39;오랑캐& #39;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 #39;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 #39;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 #39;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 #39;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하고 무조건 남하를 명령했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 #39;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39;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전투를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のア?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に?腹に?る意味に解?する。激しい??をなぞらえ書いた市?に子孫に家庭?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では、敵に?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が聞いて、
敗?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い山?が?風のように取り?んでいる。?わらない。
「?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っ?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ド?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いて鹿?島薩摩の部隊を?破した熊川海?がようにね
義明と決?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がディッキ?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を終わらせ者、?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を?えた。
しかし、??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劾されて病?の治療のために??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の全滅ではなく、艦砲で打?を加えて防御を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の意志を折っ撤退させようと風シンスギルと?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ず者、日本軍長?の酒宴負傷を負わせた。羽柴秀勝の肋骨、?田吉高マ?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が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 #39;부정부패 척결& #39;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일본의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명량 노량 한산도대첩이 아니다, 양차 진주성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설에게 패배한 일본은 전력을 다해 2차 침공을 했고 결국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 군사적으로 큰 규모의 희생이 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격분한 일본군이 이성을 읽고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민초들이 설에게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어쩌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부상진전투에 부상당한 하시바 히데카츠가 퇴각하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
○ 12월 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金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金大將) 면(沔)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徐禮元)을 김해(金海)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金?)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일제의 역사 왜곡만행,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진주대첩 배설 거사비가 홰손 된 것도 이 당시 이다.
근데, 우리 정치를 보면 아닌 것도 같다. 황제는 크녕 한반도 반쪽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피란지로 이용되었던 대규모 산성이다. 고려 말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피해 인근 백성들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다고 하며, 조선 태종 10년(1410)에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방상의 요충지로 부각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는 외성을 쌓는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으며, 고종 5년(1868)에도 새로 고쳐 쌓았다고 한다.
내외 성벽의 총 길이는 6.3㎞이며, 금오산의 정상부에 테를 둘러쌓은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과 정상부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포곡식으로 쌓은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내성의 둘레는 약 4km이며, 험한 절벽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계곡을 둘러 싼 외성은 둘레가 약 2km이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계곡과 연못, 우물이 많았고, 대혜창과 내성창 등의 창고와 진남사(鎭南寺)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 외성의 문터,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성문인 암문의 형체, 그리고 각종 건물터 들이 남아 있다. 또 성 안 고종 5년(1868)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가 있다. 금오산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의 공격을 막아 경상도 일대를 수비한 중요한 산성이다.
상세설명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고려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을 두었다. 조선 태종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 외성을 쌓는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고종 5년(1868)에 새로 고쳐 쌓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1개의 계곡과 여러 개의 연못·우물이 있었으며,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 군기고, 진남사가 있었다고 한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 누정(樓 亭) 백운재(白雲齋), 경파정(景坡亭), 금오정(金烏亭), 대관정(大觀亭), 취영정(聚英亭), 진덕정(進德亭), 긍운정(肯雲亭)....
조선 왕조는 전통적으로 전주 이씨라는 것으로 호남을 우대 하고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도 호남 동부 세력인 동인들이 주도하여 국난에 대처 했다. 임진 왜란 이후로 영남의 인재들이 본격적으로 발탁 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호서세력(유성룡, 권율, 이순신,) 조선을 주도 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영남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금오산의 황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를 다스릴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숭산과 금오산이 황지의 터임에도 물이 없어 활원이 안된다는 뜻에서 9정 7택을 조성하여 만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게 했다.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금오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풍수설도 많은 산이어서 특히 왕이 태어날 운세라는 금오산 중국과 일본을 먹여 살릴 대혜를 베풀 세계를 이끌 황제가 조선 땅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큰 덕을 외치는 소리는 지금 이시간에도 쉬지 않고 있고 지난 420년 간 흘러 내렸었다. 정상부에는 용샘(龍泉)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못한 애절한 건설이 깃든 용샘이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인 고종은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강간 살해되어 시신이 강제로 화장되고 말았었다.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19년 후인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했고,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에 국민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임진 왜란의 배설이 역적이거나 탈영병이라면 고종 황제가 영국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국난 앞에서 고종황제가 배설의 이름을 부활시킨 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역사왜곡 임을 알 수 있음에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조롱하고 있으니 어리썩음을 어찌하랴?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 #39;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 #39;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
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 #39;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9;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금오산 성 북문에 & #39;큰 은혜& #39;를 뜻하는 이름이 붙은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 #39;큰 은혜& #39;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 #39;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 #39;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 #39;읍참마속& #39;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대혜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 #39;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금오산의 물이 들어 온다면 & #39;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 #39;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금오산성을 배설이 중수한 이후에 이 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과 수많은 중소 기업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생겼났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축으로 하든 시대라면 꿈도 못꿀 일이 실현된 것입니다. 지금도 경남의 사람들이 금오산 대혜폭포의 물을 병에 받아 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군 대장 이여송이 직접 구미 금오산 지맥을 칼로자른 용우뜸에 칼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여대로가 배설이 축성한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란 구절 이로인해 조선의 금오산 황제출현 전설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남,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을 이루려는 뜻이 남달랐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정구(鄭逑)·장여헌(張旅軒)·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정암진 전설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여대로란 도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곽재우 장군를 보좌한 배설의 아들 등암 자장의 역할에 고무되어 예측한 전설이하는 주장과 여씨 시조가 정암진 부근에 있는데서 미래의 환영을 투시했었는가 보다. 어째튼 기업인들은 이러한 전설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음에도 금오산을 기축으로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한국인들이 일본 관광중에 꼭 한번 정도 가보는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구마모토산성이 바로 임진왜란에 울산에서 배설의 금오산성과 대치하면서 연구하여 금오산성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안에 우물을 24개나 만든 유일한 산성이기도 하다.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일본측의 임진왜란 15만 8천 대군중에 약 5만 명이 굶주려 죽은 사실입니다. 당시는 경상도가 남북이 없이 하나였고, 금오산을 반경으로 영남 병사들 5만을 살린 것이 결국은 일본의 군량 때문이었다고한다.^^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 #39;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 #39;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 #39;세루& #39;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주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 #39;세루& #39;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 #39;시무상주& #39;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제1차 진주성 대첩이 승리했으니 포상이 내려집니다.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は歌う。かつて熊川海?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がスパイと?筒と朝鮮軍を買わに運?してチルチョン海?では、敵に?敗を喫した。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が聞いて、敗?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조실록> (출처: 명량 왜곡과 진실 미출판부분 공개자료)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군님의 명령은 받았다고 보입니다.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 #39;오랑캐& #39;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 #39;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 #39;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 #39;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 #39;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하고 무조건 남하를 명령했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 #39;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39;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전투를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のア?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に?腹に?る意味に解?する。激しい??をなぞらえ書いた市?に子孫に家庭?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では、敵に?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が聞いて、
敗?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い山?が?風のように取り?んでいる。?わらない。
「?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っ?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ド?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いて鹿?島薩摩の部隊を?破した熊川海?がようにね
義明と決?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がディッキ?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を終わらせ者、?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を?えた。
しかし、??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劾されて病?の治療のために??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の全滅ではなく、艦砲で打?を加えて防御を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の意志を折っ撤退させようと風シンスギルと?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ず者、日本軍長?の酒宴負傷を負わせた。羽柴秀勝の肋骨、?田吉高マ?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が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 #39;부정부패 척결& #39;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일본의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명량 노량 한산도대첩이 아니다, 양차 진주성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설에게 패배한 일본은 전력을 다해 2차 침공을 했고 결국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 군사적으로 큰 규모의 희생이 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격분한 일본군이 이성을 읽고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민초들이 설에게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어쩌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부상진전투에 부상당한 하시바 히데카츠가 퇴각하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
○ 12월 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金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金大將) 면(沔)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徐禮元)을 김해(金海)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金?)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일제의 역사 왜곡만행,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진주대첩 배설 거사비가 홰손 된 것도 이 당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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