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종교개혁’은 1517년
만성절(萬聖節, 11월 1일) 전날, 비텐베르크 대학교수 루터가 면벌부(免罰符, 면죄부) 문제를 지적하는 95개 조 논제를 라틴어로 제시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날 면벌부의 개선을 요구하는 서신을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보냈다. 루터가 제시한 95개 조 논제는 이 무렵 발전하던
인쇄술에 의해 독일 전 지역에 확산되었다. 라틴어판 인쇄물은 라이프치히·뉘른베르크·바젤 등지에서 더 확산, “논제가 불과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독일어 번역본도 독일어 성경과 함께 독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루터의 서신을 받은 마인츠 대주교는 12월에 가서야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고했다. 교황은 그 이듬해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로마에 출두하여 이단 심문을 받으라는 소환장을 발부했다. 1519년
6~7월의 라이프치히 논쟁을 거쳐 1520년 6월 15일, 교황은 다시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이단적인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이단자로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해 12월 비텐베르크의 교수·학생·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파문 교서를 불살라 버렸다.
종교·민족주의 이외에 사회경제적으로 큰 영향
루터는 1520년 세 개의 논문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집필하여 개혁의 신학적 이론을
심화 발전시켰다.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의회가 루터를 신성로마제국(독일)의 법의 보호에서 제외시키자,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보호,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의 독일어 번역에 전념토록 했다.〈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 보급되자
종교개혁 및 독일 민족주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루터의 ‘개혁’과 관련, 먼저 지적할 것이 있다. 종래 루터가
95개조를 비텐베르크 성문 교회 출입문에 게시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보름스 제국회의 앞에서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고 강변하긴 했으나, 그 말에 이어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적인 관점 외에 역사적 상황이 중요시된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등 ‘다섯가지 오직(Sola)’과 칭의론(稱義論)을 내세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형성되었지만, ‘종교개혁’은
교회 밖의 역사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사적인 영향 못지않게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뜻이다.
먼저
‘종교개혁’이 끼친 사회경제적 영향과 관련, 북유럽과 독일, 덴마크 등 루터교회가 발전한 곳에서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정치인들의 청렴도·보편
교육 체계·토론 문화·사회복지 시스템·교회와 사회의 협력 관례 같은 것들의 기반”이 발달했는데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잘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이와 관련 루터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을 비교하여, ‘루터주의’가
발전한 곳에서 사회민주주의와 사회보장 제도가 발전한 데 비해, 칼빈주의가 발전한 곳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했다(막스 베버)는 지적이 있는데
흥미로운 관찰이다.
종교개혁, 중세사회를 근대사회로 이끈 힘
루터가 1520년에 쓴 3대 논문 중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는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을 주장하여 그 파장이 교회 안팎에 크게 울렸다.
요지는, 크리스천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교통할 수 있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종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격인 성직자 계급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7성사(聖事)는 세례 성찬으로 바뀌었고,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종래 사제만 부르던
찬송도 성도들이 함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예배와 성례전에서 이렇게 변화를 가져왔다.
‘만인사제설’이 주는 더
중요한 메시지는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을 극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한 주간의 일상적인 삶이 주일의 거룩한 삶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직업에서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이 없게 되었고, 모든 직업(Beruf)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召命, Berufung)으로 되었다.
종래 소명은 영적 직무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루터는 이를 세속 영역에까지 확장시켰다.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곧 성직(聖職)이라고 했다. 루터는 자기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면 그것이 곧 세상을 예배로 가득 채우는 길이라고 했다. 루터에게
직업이란 이웃을 섬기기 위해 부름받은 모든 자리를 의미했다.〈최주훈, 286〉 직업의 소명화는 근대사회 발전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 밖에도
‘종교개혁’의 성속이원론의 타파는 음악 미술 심지어는 근대과학의 발전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루터의 활동에는 부정적인
것도 있었다. 농민운동 및 유대인에 대한 자세에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 루터는 자신의 개혁에 적극 호응, 농민운동을 이끈 뮌처(Thoms
Munzer, 1490년경~1525)와 농민군들을 향해 ‘기독교도가 아닌 자들’이라고 규탄하는 한편 영주들에게 이들 농민군을 학살토록 했다.
루터의 반유대인적 자세도 당대 유럽인의 유대인 인식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여튼 “루터는… 유대인들의 삶의 기반을 박탈하고 추방하려 했고, 봉건적
착취와 사회적 모순의 개선을 기대했던 농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때려죽이라고 촉구했다.”〈박흥식, 236〉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이런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지리상의 발견 및 인문주의 운동과 함께 중세사회를 근대사회로 이끈 역동적인 힘이었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